■ 공연명 : 서울시향의 '신성한 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THE DIVINE POEM ■ 일시 및 장소 : 12월 14일 (목)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 지 휘 : 미하일 아그레스트 Mikhail Agrest, conductor ■ 피아노 : 드미트리 마슬레예프 Dmitry Masleev, piano ■ 프로그램 보로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Borodin, In the Steppes of Central Asia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2 in C minor, Op. 18 스크리아빈, 교향곡 제3번 '신성한 시' Scriabin, Symphony No. 3 in C minor, Op. 43 'The Divine Poem' ■ 티켓가격 : 70,000원(R), 50,000원(S), 30,000원(A), 20,000원(B), 10,000원(C) |
* 공연문의 : (재)서울시립교향악단 1588-1210
신비로운 러시안 후기 낭만음악의 향연
<신성한 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12.14)
● 12월 14일(목) 저녁 8시 롯데콘서트홀에는 서울시향의 <신성한 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기다리고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 소속 지휘자인 미하일 아그레스트와 2015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 우승자 드미트리 마슬레예프가 진정한 러시안 로맨티시즘으로 가득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이날 공연에서는 보로딘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그리고 스크리아빈의 신비주의로 가득한 교향곡 제3번 '신성한 시'가 연주될 예정이다. 러시아의 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젊은 음악가들이 만드는 가장 러시아다운 무대를 기대해 보아도 좋다.
2015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우승, 러시아 피아니즘의 차기 계승자, 피아니스트 드미트리 마슬레예프
● 2015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만장일치로 우승을 거머쥔 피아니스트 드미트리 마슬레예프(1988년생)도 이번 공연에서 함께하여 러시안 피아노 레퍼토리의 대표곡인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한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후 첫 투어 활동을 시작으로 유럽과 북미, 아시아를 넘나들며 연주 활동 중인 그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 등 정상급 오케스트라들과 호흡을 맞춰오며 명성을 쌓고 있다. 특히 2016년 스위스에서의 공연에서는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대체 연주자로 독주 무대에 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마슬레예프는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등 러시아의 거장 음악가들을 배출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수학하였으며 러시아 피아니즘의 탁월한 계승자로 평가받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대표 지휘자, 미하일 아그레스트
● 러시아를 대표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소속의 지휘자 미하일 아그레스트(1975년생)가 서울시향에 찾아온다. 오페라부터 발레, 교향곡까지 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그는 미국의 인디애나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전설적인 마에스트로 일리야 무신 아래에서 지휘를 공부하였다. 러시아 특유의 뜨거운 지휘 전통을 계승한 스타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그는 드레스덴 필하모니,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시애틀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꾸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2004년에는 키로프 발레단과 키로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한국을 찾아 성공적인 첫 내한공연으로 호평 받은 바 있다 서울시향과의 첫 호흡에서 그가 만들어갈 진정한 러시안 로맨티시즘이 궁금하다.
러시아에서 온 따듯한 음악 선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사랑받고 있는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무대에 오른다. 피아니스트의 엄청난 기량을 요하는 그의 여타 피아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곡 또한 깊은 음악성과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한다. 특히 풍부한 음향과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한 후기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의 짙은 우수성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곡이 마무리된 후에도 긴 울림을 남기는 감성이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의 쓰라린 실패를 딛고 제2번을 완성하였으며, 1901년 본인이 직접 초연하여 대성공을 이루게 된다. 이후 글린카 상(賞)을 수여받아 라흐마니노프가 세계적인 작곡가로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한 곡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에도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서정적인 멜로디로 대중성이 높아 영화, 드라마, 광고에서도 자주 쓰이는 곡이다.
동양적 감각과 우주를 품은 추상적 신비주의 음악의 만남
보로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스크리아빈, 교향곡 제3번 '신성한 시'
●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발라키레프,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의 마지막 작곡가인 알렉상드르 보로딘의 소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가 이번 공연의 첫 곡으로 연주된다. 중앙아시아 어딘가의 넓은 초원의 하늘에 해가 떠오르는 듯한 이미지가 그려지는 이 곡은 1881년 보로딘이 평소 존경하던 작곡가 리스트에게 헌정하게 된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눈으로 생생하게 직접 보는 것과 같으며, 초원에 울려 퍼지는 러시아 음악의 아련함에 더해 동양의 음악 또한 들리기도 한다.
마지막으로는 스크리아빈 교향곡 제3번 '신성한 시'가 공연을 마무리한다. 신비주의에 기초한 그만의 새로운 화성체계로 조성되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실험적인 형식이 특징이다. 쇼팽과 리스트의 영향이 깊숙이 스며든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작품들과는 달리 그의 교향악 작품들은 바그너와 R. 슈트라우스의 세계에 가까운 진취적인 느낌이 강하다. 당시 신비주의 철학에 관심을 가지며 우주와 철학을 음악에 녹여내려 했던 그는 이 교향곡에서 거대한 규모의 오케스트레이션과 함께 신성한 우주적 신비를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티켓가격: 1~7만원)
<연주자 프로필>
■ 지휘_미하일 아그레스트, Mikhail Agrest
러시아 특유의 지휘 전통을 계승한 미하일 아그레스트는 10년 이상 마린스키 극장에서 오페라와 교향악 모두를 아우르는 지휘 능력을 쌓으며 오케스트라의 발전과 예술적 리더십에 대한 식견을 갖추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유수의 신생 앙상블들을 이끌며 예술적 네트워크를 갖춰왔다.
2016/17 시즌 그의 주요 활동으로는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와의 프로젝트,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 데뷔 무대, 브레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핀란드 국립 오페라 등 명망 있는 단체들과의 활동이 있다. 또한 그는 지난 시즌 시애틀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무대 이후 다시 초청 받아 연주하는 등 지휘자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그레스트가 2003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함께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시의 전설>은 국제 오페라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관심을 끌어 모으기도 했다. 그는 스웨덴 국립 오페라와 <토스카>를, 오스트레일리아 오페라와 <돈 지오바니>를, 영국 국립 오페라와 <예누파>를 선보이는 등 오페라 지휘자로서 입지를 굳건히 했다.
2013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에서 지휘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R. 슈트라우스의 연주가 성황리에 막을 내린 것을 계기로 아그레스트는 젬퍼오퍼로부터 러브 콜을 받아 <트라비아타>를 지휘했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레타 <모스크바 체료무시키>를 선보이며 "이 공연을 감상한 모든 관객의 머릿속에 이 작품의 선율이 맴돌았다"(노이에 무직 차이퉁 Neue Musikzeitung)고 평가 받기도 했다. 아그레스트가 지휘한 오케스트라로는 드레스덴 필하모니,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시애틀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아그레스트는 10대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인디애나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그는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전설적인 거장 일리야 무신에게 지휘를 사사했다.
■ 피아노_드미트리 마슬레예프 Dmitry Masleev
2015 차이콥스키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우승자인 드미트리 마슬레예프는 청중, 심사위원, 그리고 언론으로부터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첫 투어 무대를 통해 "뛰어난 미래의 피아니스트(프랑스 라 크루아)", "탁월한 비르투오소"(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라고 평가 받은 마슬레예프는 독일 루즈 피아노 페스티벌, 라 로크 당테롱 국제 피아노 페스티벌, 브레시아 피아노 페스티벌, 거장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유리 바쉬메트와 함께한 일본 투어, 툴루즈 카피톨 국립 오케스트라에서의 프랑스 데뷔를 선보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공연에서는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대체 연주자로 무대에 오르며 주목 받기도 했다.
여러 무대에 오르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워온 마슬레예프는 2017년 1월 카네기 홀의 아이작 스턴 홀에서 스카를라티, 베토벤,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등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아온 작품들을 연주했다. 2016/17 시즌 그의 주요 활동으로는 파리 필하모니, 루이비통 파운데이션에서의 협연이 있으며, 마에스트로 게르기예프로부터 초청받아 가슈타이크 필하모니에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제1번부터 제3번까지)를 연주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또한 그는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와의 독일 투어,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아시아 투어,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무대를 갖는 등 정상급 오케스트라들과 호흡을 맞췄다.
러시아 울란우데에서 태어난 마슬레예프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니스트 미하일 페투호프를 사사했으며 미국 레이크코모의 국제음악원에서 수학한 바 있다. 모스크바에서 차이콥스키피 국제 피아노 콩쿠르 1위를 거머쥔 그는 이후 제7회 아딜리아 알리에바 피아노 콩쿠르(2010), 프레미오 쇼팽 피아노 콩쿠르(2011), 안토니오 나폴리타노 피아노 국제 콩쿠르(2013) 등 유수의 콩쿠르에서 수상했다.
<상세 프로그램>
■ 12.14 서울시향의 '신성한 시'
THE DIVINE POEM
<프로그램>
보로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9')
Borodin, In the Steppes of Central Asia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33')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2 in C minor, Op. 18
I. Moderato
II. Adagio sostenuto – Più animato
III. Allegro scherzando
- Intermission -
스크리아빈, 교향곡 제3번 '신성한 시' (50')
Scriabin, Symphony No. 3 in C minor, Op. 43 'The Divine Poem'
Introduction
I. Luttes ("Struggles")
II. Voluptés ("Delights")
III. Jeu divin ("Divine Play")
<프로그램 노트>
신성한 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글 :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
■ 알렉산드르 보로딘 (1833-1887)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1880)
보로딘은 발라키레프, 큐이,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소위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로 일컬어지는 민족주의 작곡가 그룹의 일원으로서, 다섯 명 중 가장 연장자이면서 이 그룹에 가장 늦게 합류한 인물이었다. 그의 본업은 화학자여서 평일에는 연구 및 교수활동에 매진하고 작곡활동은 주로 주말을 이용해서 했기에 그 스스로 '일요 작곡가'로 칭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남긴 작품의 수효는 적은 편이지만, 그는 국민악파로서는 드물게 교향곡과 현악 사중주라는 고전적 장르에 매진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 '5인조' 중에서 가장 먼저 국제적 명성을 떨쳤다. 특히 '교향곡 2번'과 '현악 사중주곡 2번', 오페라 '이고르 공'(미완성), 그리고 이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는 러시아 낭만주의의 주요 명작들로 꼽힌다.
원래는 단순히 '중앙아시아에서'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던 이 관현악곡은 리스트의 교향시를 모델로 삼은 표제음악이다. 그중에서도 다분히 정경묘사적인 성격을 띤 음화(音畵)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묘사 대상은 중앙아시아의 초원(steppe)을 지나는 대상(隊商)의 행렬이다. 작곡가가 제시한 해설에 따르면, 곡은 광막한 중앙아시아의 초원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떠올리며 시작된다. 이내 멀리서부터 말들과 낙타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그것과 함께 평온한 러시아의 민요와 우울한 동방의 노랫소리도 들려온다. 이윽고 러시아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대상의 행렬이 가까이 다가오면, 병사들의 노래가 힘찬 행진곡풍으로 당당하게 부각된 후 러시아의 선율과 아시아의 선율이 한 데 어우
러져 멋진 화음을 이룬다. 행렬은 광야를 가로지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그들이 지평선 멀리 사라짐에 따라 그 화음도 잦아든다.
보로딘 특유의 동방적인 필치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초원 위에서 펼쳐지는 이국적인 정경을 너무나도 절묘하게 그려낸 이 교향시는 1880년에 작곡되었는데, 그해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즉위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이 교향시 역시 그 행사의 일환으로 기획된 무대극의 부수음악으로 작곡되었으나, 이 무대극은 실현되지 못하고12명의 작곡가가 쓴 음악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그 이듬해 보로딘은 독일의 바이마르를 방문했는데, 그때 이 곡을 존경하는 리스트에게 헌정했다.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873-1943)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 Op. 18 (1901)
'5인조'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근거지로 민족주의를 추구했던 비해, 그들보다 한 세대 뒤인 라흐마니노프는 서구화를 지향했던 모스크바 악파의 적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차이콥스키를 존경했고 차이콥스키의 격려를 받으며 그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모스크바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차이콥스키처럼 러시아인 특유의 진한 우수의 정서를 감미로운 선율에 실어낼 줄 알았고, 그것을 화려한 피아니즘이나 풍부한 관현악법으로 풀어내는 수준 높은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젊은 시절에 겪은 시련이 없었더라면 그가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는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 지는 미지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1897년 3월 28일, 25세의 라흐마니노프는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야심차게 준비한 첫 번째 교향곡의 초연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실의에 빠진 나머지 작곡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고, 그 후 3년 넘게 거의 아무 곡도 쓰지 못 한 채 연주활동에만 매달렸다. 결국 그는 수소문 끝에 심리치료의 권위자로 알려진 니콜라이 달 박사를 찾아갔다. 달 박사의 처방은 일종의 '자기암시 요법'이었는데, 환자에게 가벼운 최면을 걸어놓고 그 귓가에서 필요한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치료를 3개월 정도 지속하자 효과가 나타났고,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새로운 대작에 도전했다. 그 작품에 그가 그동안 겪었던 상처, 회한, 몸부림의 잔영이 드리운 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1901년 11월 9일, 마침내 그의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이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연주로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글린카 상' 수상의 영예까지 뒤따랐다. 그의 재기는 한편으로 장차 러시아 낭만주의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거인의 나래가 비로소 활짝 펼쳐진 주목할 만한 사건이기도 했다.
제1악장 첫 악장은 묵직한 피아노 독주로 출발한다. 낮고 어두운 화음과 깊숙한 베이스 음이 교대로 울려 퍼지는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심상은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주요 아이콘인 '종소리'이다. 점점 크게 들려오는 그 종소리는 마치 각성과 재기를 촉구하는 신호처럼 들리기도 한다. 일련의 종소리가 정점에 도달하면, 다음 순간 현악 파트에서 러시아풍의 제1주제가 터져 나온다. 그 음울하고 강렬한 흐름은 마치 인생을 휩쓰는 비운의 그림자처럼 펼쳐지고, 그것이 일단락되면 피아노가 서정적인 제2주제를 등장시킨다. 이 E♭장조 선율은 음계를 보다 빠르게 오르내리며 현악 선율과 어우러져 작품에 서정적 이미지를 더한다. 이어서 장엄한 금관의 화음과 함께 발전부로 진입하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한층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흐름을 타고 격렬한 드라마를 구축해 보인다. 재현부 이후의 흐름은 더욱 흥미로운데, 제1주제는 행진곡풍으로 재등장하고, 제2주제는 길게 늘어져 호른의 나직한 소리로 노래된다. 카덴차는 생략되며, 종결부는 이완된 분위기에서 출발하여 수수께끼처럼 흐르다가 다시 힘을 모아 강력한 울림으로 막을 내린다.
제2악장 이 중간악장은 여러 모로 라흐마니노프의 멘토였던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을 연상시킨다. 일단 시작 부분에서 오케스트라에 의한 짧은 경과구가 나타나 앞선 악장의 조성(C단조)에서 본 악장의 조성(E장조)으로 이행하는 수법이 그렇고, 그 다음에 주제를 꺼내놓는 플루트 및 클라리넷 솔로가 나타나는 부분도 그러하다. 아울러 악장 중간에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스케르초풍 섹션이 삽입된 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악장의 느린 부분은 몽환적인 기운으로 가득하여 마치 최면상태에 빠진 라흐마니노프의 의식의 흐름을 그린 듯하다. 갖가지 환영들이 스쳐 지나가는 그 흐름 속에서 의식은 때로 그 수면 아래 잠겨 허우적거리는 것 같기도, 솟구치려 몸부림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 모든 아픔과 고뇌를 뒤로 하고 밝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의연한 발걸음이 떠오르는 듯하다.
제3악장 먼저 다소 경박한 춤곡풍 리듬 위에서 진행되는 오케스트라의 전주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화성은 앞선 악장의 E장조에서 본 악장의 C단조로 움직인다. 계속해서 피아노가 현란한연결구를 연주한 다음 격앙된 제1주제를 펼쳐 놓고, 그로 인한 흐름이 일단락되면 제2주제가 오보에와 비올라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이 러시아풍 선율은 제1악장의 제2주제와 연계되어 있다. 발전부와 재현부를 대단히 긴박하고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 후에, 마지막 절정부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오케스트라의 격앙된 합주로 제2주제를 커다랗게 부각시킨다. 마치 승리의 선언처럼 들리는 이 희열 넘치는 클라이맥스를 기점으로 음악은 환한 C장조로 전환되고, 그 기세를 그대로 몰고 나가 강한 긍정과 확신을 나타내는 C장조 으뜸화음을 장쾌하게 울리면서 마무리된다.
■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 (1872-1915) 교향곡 제3번 C단조, Op. 43 '신성한 시' (1904)
라흐마니노프가 러시아 낭만주의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면, 그의 모스크바 음악원 동창생이었던 스크리아빈은 러시아 낭만주의가 낳은 돌연변이와도 같은 존재였다. 라흐마니노프처럼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병행했던 스크리아빈은 처음에는 피아노에서는 쇼팽의 영향을, 작곡에서는 후기낭만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지만, 서른 살 무렵부터 '신비주의 철학'에 심취하여 사상과 생활, 음악에 있어서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마담 블라바츠키(Elena Blavatsky)를 만나면서 신지학(theosophy)에 경도되어 예술적 체험과 종교적 체험의 일치를 추구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펼쳐나갔다.
1902년에서 1904년 사이에 작곡된 '교향곡 3번'은 그의 창작방식이 기존의 낭만주의적인 어법에서 신비주의에 입각한 지극히 개인적인 어법으로 이행하던 과도기에 나온 작품이다. 그 무렵 스크리아빈은 니체의 '초인 사상'에 대한 감화를 표출한 '교향곡 2번'을 완성한 후 특유의 신비주의적 음악미학을 한층 진전시키고 있었다. 3관 편성을 기본으로 금관 파트를 확대(호른 8대, 트럼펫 5대)한 오케스트라를 사용한 이 작품은 세부와 구조의 면에서 아직 앞선 두 편의 교향곡이 취했던 후기낭만적 어법에 기대고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모든 요소들이 스크리아빈이 새로이 표방한 음악적 개념과 그 표현을 위해서 집중되는 경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 '신성한 시'라는 부제를 붙이는 한편 '내가 얻은 새로운 가르침의 첫 선포'라고 적기도 했다. 그리고 초연을 위한 프로그램 노트에서 그는 이 작품이 '인간 정신(영혼)의 진화'를 나타내고 있으며, 인간 정신이 과거에 얽매이고 극복했던 전설과 신비로부터 해방되고, 범신론의 단계를 통과하여, 궁극적으로는 자유와 우주와의 합일을 쾌락과 도취 속에서 확언하는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려 보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작품은 교향곡 또는 '3악장으로 구성된 교향시'로 규정할 수 있는데, 각 악장에도 작곡가가 부여한 표제가 있다. '투쟁(Luttes)'으로 명명된 제1악장은 다른 신에게 예속된 인간과 스스로 신의 경지에 오른 인간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이 첫 악장은 짧은 서주로 출발하는데, 여기에서 금관으로 제시되는 두 개의 대비되는 모토 주제, 즉 저음부(트롬본, 튜바)에서 짓누르듯 하강하는 엄숙한 악구와 고음부(트럼펫)에서 상승하는 빛나는 악구는 전곡을 통해서 다양한 맥락과 형태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주부로 넘어가면 현이 다소 격앙된 표정으로 등장하여 스크리아빈 특유의 유동적인 흐름으로 나아가는데, 그 선율은 단조 음계와 장조 음계를 매끄럽게 넘나들며 조성의 경계를 허물고, 은밀한 뉘앙스와 뜨거운 고조 사이를 유연하게 오르내리는 리듬의 탄력적 전개
와 흐름의 절묘한 완급은 밀물과 썰물의 교대를 연상시킨다. 이후 두 악장은 단락 없이 연결되는데, 먼저 제2악장 '쾌락(Voluptés)'은 고도로 정제된 음률의 관능적 유희로 규정할 수 있는데, 초입의 고요하고 달콤한 음악에서부터 말미의 흐드러진 관능적 분출의 음악까지를 점진적으로 아우르고 있으며, 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색채적인 중간부가 특히 인상 깊다. 쾌활하게 출발하는 제3악장 '신성한 놀이(Jeu divin)'에서 인간의 정신은 복종의 단계에서 해방되어 보다 높은 권능의 단계로 나아간다. 그 과정은 매우 변화무쌍하여 유쾌한 유머와 장려한 위엄, 온유한 서정과 강렬한 열정, 과거에 대한 회상 등을 두루 섭렵하며 거대하고 강력한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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